김환석 교수-오세정 교수 논쟁

아래 글은 지난 상반기 교수신문에서 연재되었던 논쟁을 교수신문의 양해를 얻어 재전제한것입니다. 먼저 과학기술에 참여민주주의를 도입하자는 김환석교수(국민대, 과학기술사회학)의 글이 실렸었고, 다음호에 이를 비판하는 오세정교수(서울대, 물리학)의 글이 실렸습니다. 이에 반론과 재반론이 이어진후 송상용(한림대, 사학)교수의 논쟁에 대한 의견글이 실렸으며 마지막으로 각자 논쟁을 정리한 글이 이어집니다.

1과학기술에도 참여민주주의 필요하다 98.3.9 / 김환석

지난 수십년간 우리나라에서는 과학기술의 발전 그 자체를 의심의 여지가 없는 하나의 절대적인 가치로 신봉하여 왔다고 볼 수 있다. 이는 과학기술의 발전이 우리 국민이 누리는 삶을 크게 향상시킬 뿐 아니라, 100년 이상이나 뒤진 우리나라의 근대화·산업화를 앞당겨 부국강병을 이룩하는 데 과학기술이 절대적으로 중요한 수단이 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우리나라는 이제 경제와 더불어 과학기술면에서도 양적으로는 비약적인 성장을 이루어 종합적인 과학기술력 수준이 세계 14위에 이르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성장과 과학기술 발전은 동시에 지속적인 환경파괴와 안전재난, 복지 낙후 등 국민의 삶의 질의 희생 위에서 실현되어 온 것도 사실이다. 전세계적으로도 과학기술이 물질생활의 풍요함을 가져다주기는 하였지만 지구환경 위기와 생명조작의 위험성 등 인류와 자연을 공멸로 몰아넣을지도 모르는 '위험사회'를 또한 만들어내고 있다는 인식이 점점 고조되고 있다. 이제 과학기술이 천사의 얼굴만이 아니라 악마의 모습도 지녔음을 외면할 수 없게 되었고, 따라서 이미 우리 사회의 일각에서도 심층생태주의에 입각한 반과학기술주의적 사상과 운동들이 속속 나타나고 있는 실정이다.

과학기술의 발전은 더이상 지고의 선으로 생각될 수 없으며 이제는 "누구를 위한, 무엇을 위한 과학기술이냐?"의 문제를 냉철히 따져보는 것이 오늘날 마땅히 필요한 자세이다. 그러나 과학기술만능주의도 위험하고 잘못된 것이지만 반과학기술주의도 지나친 이상주의에 기반한 현실괴리적인 사상이다. 이 두 가지의 암초를 피해 우리가 올바로 과학기술을 이해하고 대처하는 길은, 현존하는 과학기술의 부정적 측면에 대한 이성적 비판을 통해 삶의 질을 위한 과학기술로 재지향을 해내는 일이다.

과학기술에 대한 학문적인 이해는 1970년대 이후 크게 바뀌어 왔다. 쿤(T. Kuhn)의 저서 <과학혁명의 구조>와 그것이 촉진한 과학철학의 상대주의 논쟁은 기존의 실증주의적 과학관과는 달리 과학지식의 결정도 사회적 요인으로 설명하려고 시도하는 '과학지식사회학'(sociology of scientific knowledge)을 출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이들은 과학논쟁 분석과 실험실의 참여관찰 연구 등을 통해서 과학지식이 어떻게 과학자들간의 사회적 협상을 통해 구성되고 이 과정에서 과학자들의 다양한 이해관계가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생생히 그려내었다.

더 나아가 1980년대부터는 이러한 접근이 기술을 설명하는 데 응용되면서 기존의 지배적 관점이었던 기술결정론을 효과적으로 비판하는 새로운 기술사회학 이론들을 출현시켰다. 기술이 구성되는 과정 역시 가치판단이 깊게 개입되는 일종의 사회적 과정이며, 따라서 기술에 수반되는 사회적 결과도 이러한 과정을 이해함으로써만 제대로 파악할 수 있다고 이들은 주장한다.

'사회적 구성론'(social constructivism)이라고 총괄하여 불리는 이 새로운 과학기술론은 과학기술정책에도 새로운 시사점을 던져주고 있다. 우선 과학기술을 보편적 합리성의 산물로 절대화하지 않고 그 사회적인 구성과정을 해체해서 보여줌으로써, 기존의 과학기술의 권위에 대한 탈신비화를 가능하게 만든다. 즉 과학기술은 초사회적인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 가부장제, 민족국가 등으로 특징지어지는 근대사회의 맥락 속에서 구성된 것이며, 따라서 과학기술이 오늘날 위험사회를 초래하는 것은 이러한 사회적 구성의 특징이 수반한 결과라는 사실이 점점 밝혀지고 있다. 더 나아가 현재의 과학기술이 유일한 발전경로가 아니며 대안적 과학기술의 사회적 구성이 가능하다는 주장도 점점 제기되고 있다.

지금 우리 사회에서는 과학기술은 비판할 수 없는 성역이고 따라서 과학기술정책은 전문가와 엘리트만이 모여 논의하고 결정할 수 있다는 전문가주의에 지배되어 있다. 일반 시민에게 주어진 역할이란 정책의 일방적 홍보 대상이 아니면 이미 정해진 과학기술 산물의 수동적 소비자일 뿐이다. 인간적이고 환경친화적인 대안적 과학기술이 발전할 수 있으려면 현재 과학기술의 사회적 구성에서 소외되어 있는 다양한 시민집단이 참여하여 민주적인 과학기술정책을 제도화하는 일이 시급하다고 생각된다. 최근에 번역된 영국 과학사회학자 앤드루 웹스터의 저서 <과학기술과 사회>(김환석·송성수 공역, 한울)는 새로운 과학기술사회학의 흐름과 이것이 과학기술정책에 어떤 시사점을 던져주는가를 잘 설명하고 있는 책으로서 이에 많은 참고가 될 것이다.

한편 위와 같은 시민참여가 가능하려면 과학기술과 관련한 현재의 교육제도에 근본적 변화가 요구된다. 우리의 사회화과정을 보면 이공계/인문사회계, 전문가/비전문가간의 '두개의 문화' 현상이 고착되고 확대재생산이 되도록 교육을 받아 왔다. 인문사회 전공자는 과학기술에 무관심하고 과학기술 전공자는 인문사회 지식에 어둡도록 이분화된 교육체계 속에서 길러졌고, 비전문가는 자율적 판단능력을 키우기보다는 전문가에게 철저히 의존되도록 길들여져 왔다. 그 결과 과학기술은 일반시민에게서 먼 세계에 있는 '암흑상자'처럼 되어버렸고, 이는 과학기술시대의 민주주의와 삶의 질 향상에 큰 위협이 되고 있다.

서구에서는 60년대 말 환경위기와 반전운동으로 과학기술에 대한 비판 의식이 고양되는 가운데, 그동안 전문지식 위주의 편협했던 과학기술교육에 대한 반성으로서 학계에서 다양한 '과학기술과 사회'(STS) 프로그램들을 설치하게 되었다.

69년 코넬대, 펜실베니아주립대, 뉴욕주립대(스토니브룩)을 필두로 하여 이후 매사추세츠공대, 워싱턴대, 미시간대, 스탠포드대 등이 뒤를 따랐다. 이 프로그램들에서는 과학기술의 철학, 역사, 정치, 경제, 문화, 윤리 등에 관하여 학제적인 연구를 수행하며 그 결과를 교육내용에 담아 널리 보급함으로써, 과학기술과 관련된 사회문제에 현명히 대처하고 이공계와 인문사회계간의 높은 장벽을 허무는 것을 추구하고 있다. 현재 미국만 보더라도 이런 프로그램을 학위과정으로 설치한 대학이 약 30개가 되며 80년대부터는 초·중등 교육현장에서도 이런 교육이 확산되어 다양한 STS 교재와 수업방법이 개발·활용되고 있다. 로버트 예거의 <STS 무엇인가>(조희영·최경희 공역, 사이언스 북스)에는 미국을 비롯한 많은 나라의 STS교육 현황이 잘 소개되어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10여년 전 서울대에 과학사·과학철학협동과정이 개설된 데 이어 90년대에 들어와 고려대, 전북대 등에 과학학협동과정이 개설되었고, '과학기술과 사회' 혹은 '과학기술의 역사'같은 과목이 학부 교양과목으로 채택되고 있다. 또 최근에는 국내의 중등학교 과학과목 수업에서도 STS를 도입하려는 시도가 많이 이루어지고 있다. 그러나 아직 국내의 학계와 사회에서는 STS의 의의와 필요성에 대한 이해가 크게 부족한 실정이다. 전통적인 문과/이과의 구별과 대학내의 폐쇄적 학과중심 풍토는 STS가 쉽게 뿌리 내리지 못하게 만들고 있으며, 취업에서도 STS 전공자는 사회의 몰이해로 인해 불리함을 면치 못하고 있다.

STS 교육이 활성화되면 과학기술자가 풍부한 사회적 안목과 책임의식을 갖추게 되어 환경친화적이고 인간적인 과학기술의 발전을 촉진할 것이다. 뿐만 아니라 정책결정가, 경영자, 노동조합, 언론인, 교사 그리고 무엇보다 일반시민이 현명하게 과학기술을 통제하고 이용하는 능력이 향상되어 과학기술시대의 참여민주주의 실현에도 기여하게 될 것이다.

2상대주의 과학관에 문제있다 김환석교수의 과학기술과 새로운 과학기술정책을 읽고 98.3.23 /오세정

지난 호에 김환석 교수는 '과학기술학과 새로운 과학기술정책'이라는 제목의 흥미있는 기고문을 통해, 최근 구미에서 많이 연구되고 있는, '과학지식사회학'의 '사회적 구성론'을 소개하면서 우리나라에서도 "인간적이고 환경친화적인 대안적 과학기술이 발전하려면 현재 과학기술의 사회적 구성에서 소외돼 있는 다양한 시민집단이 참여해 민주적인 과학기술정책을 제도화하는 일이 시급하다"고 주장했다. 김 교수는 이를 위해 인문사회계와 이공계의 벽이 두터운 현행 교육제도의 근본적 변화가 필요함을 역설했고, 특히 '과학기술과 사회'(STS) 프로그램 강화를 구체적인 방안의 하나로 제시했다.

필자도 우리나라 과학기술 정책 결정에 더 많은 국민들의 참여가 필요하고 이를 위해 교육제도의 개혁이 요구됨에는 전적으로 동의하지만, 그 근거로 제시한 '과학지식의 사회적 구성론'에는 실제 과학연구 현장에서 활동하는 사람의 하나로서 많은 문제점이 있다고 느끼기에 이 글을 쓴다.

과학의 냉엄한 비판자는 '자연'

현대사회에서 과학기술의 영향력이 막강함은 모든 사람들이 피부로 느끼고 있다. 일반 시민들의 생활은 과학기술의 발달로 예측하기 어려운 속도로 변화하고 있으며, 앨빈 토플러의 말을 빌릴 필요도 없이 작금 우리나라의 IMF 위기도 정보통신기술의 발달에 따른 급속한 국제금융자본의 이동이 가능했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다. 좋든 싫든 과학기술의 영향을 피할 수 없다. 게다가 운송기술의 발달과 국제무역의 자유화로 모든 기업에게는 세계가 경쟁무대가 되었는데, 우리 기업이 이 경쟁에서 이길 만큼 기술력이 없었기에 결국은 외환위기를 맞은 것이 아닌가.

이렇듯 과학기술이 민족의 사활을 좌우하는 문제가 됐는데도, 아직 우리 국민의 과학기술에 대한 이해와 관심의 정도는 미약하고 전문가들의 태도는 너무 고압적이다. 예를 들어 원자력발전소나 핵폐기물처리장 추진과정을 보면, 주민들은 비과학적인 선입견에서 극단적인 주장을 펴는 일이 많고 소위 전문가들은 설득의 노력보다 '우리가 제일 잘 아니 우리에게 맡겨라'는 식의 대응이 주를 이룬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김 교수의 지적대로 "기술만능주의와 반과학기술주의의 두 가지 암초를 피해, 이성적 비판을 통하여 삶의 질 향상을 위한 과학기술로 재지향하는 일"이 중요하다. 이것이 실현되려면 일반 국민들의 과학기술에 대한 이해가 깊어져야 하고, 과학기술자들도 자신의 일이 사회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보는 책임있는 자세가 필요할 것이다. 인문사회계와 자연계의 벽이 두터운 현재의 강직된 우리나라 교육과정이 개선돼야 하고, 이 점에서는 필자도 김 교수의 주장에 전적으로 동의하는 바이다.

그러나 과학적 지식이 합리적 추론과 객관적 관찰에 의해 얻어진 보편적 진리가 아니라 단지 과학자들간의 사회적 협상과 합의에 의해 구성된 것이라는 '사회적 구성론'과 '상대주의'에 근거해, 일반 시민의 참여가 자본주의와 가부장적 사회 제도의 결과인 현재 과학의 폐해를 제기하고 대안적 과학기술의 발전을 가져올 것이라는 일부 과학지식사회학자의 견해에는 동의할 수 없다. 우선 사실들의 경험과 역사적 사실에 비춰 과학지식의 '사회적 구성론'과 '상대주의'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물론 과학도 사람이 하는 일이기 때문에 과학자들끼리의 인간관계나 외부 사회의 영향을 받는다. 예를 들어 과학적 논쟁이 붙었을 때, 학계에서 널리 알려져 있고 명망있는 과학자의 학설에 먼저 비중이 가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과학에는 '자연'이라는 냉엄한 심판자가 있다. 아무리 유명한 학자의 학설이라도 실험 사실과 맞지 않을 경우에는 결국 도태된다. 일부 '상대주의' 과학지식사회학자들은 이때에도 실험 결과의 해석에서 사회적인 영향을 받기 때문에 이것은 객관적 사실이 되지 못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과학의 역사에서 힘없는 과학자가 대다수의 상식에 어긋나는 주장을 해서 궁극적으로 인정받는 경우는 수없이 많다. 대표적인 예가 아마도 아인슈타인의 광양자이론과 특수상대성이론일 것이다.

이 이론은 그때까지 수 백년간 인정됐던 물리학 체계와 당시 물리학계의 거장이었던 플랑크나 로렌츠의 학설과 배치되었으나, 결국은 진실로 인정되지 않았던가.

본질적 내용까지는 못바꿔

'상대주의'의 또 다른 근거로 현재의 과학이 자연을 이해하는 유일한 논리체계가 아니라는 주장을 내세우기도 한다. 사실 한의학과 양의학이 서로 다른 논리 체계를 가지고도 사람의 병을 고칠 수 있는 것과 같이, 현재의 과학이론 이외에도 자연 현상을 합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논리 체계가 있을 지 모른다. 그러나 이러한 가상적인 '해석적 유연성'을 확대해, 사회적 영향이 과학의 근본적 '내용'까지도 바꿀 수 있다고 하는 '상대주의'는 논리의 지나친 비약이라고 생각한다.

더욱이 물질문명 발달에 따른 환경 파괴나 대량살상무기의 출현 등 과학기술의 역기능이 자본주의와 민족국가라는 사회적 환경에서 태어난 현대 과학의 내재적인 문제라고 주장하며, 이를 고치기 위해 일반 시민들이 과학 발전에 참여해 인간적이며 환경친화적인 대안적 과학기술을 발전시켜야 한다는 주장은 위험하기조차 하다. 인류역사를 통해 어떤 특정한 목적을 위한 문화활동은 利보다는 害를 더 많이 끼쳐 왔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며, 과학기술의 영역에서도 20세기 초반의 우생학과 구 소련의 '리셍코주의' 유전학에서 그 생생한 예를 볼 수 있다. 또한 '인간적이며 환경친화적'인 과학기술을 발전시켜야 한다는 주장은, 과학기술을 인류의 지적 지평을 넓히는 문화활동이라고 이해하면, '인간적이며 환경친화적'이라는 수식어 자체가 무의미해진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이 환경친화적인지 환경파괴적인지 하는 판단을 할 수 있을까.

물론 구체적인 과학기술 활동 중에는 가치 판단이 분명한 것도 있다. 독가스 등 화학무기를 제조하는 화학자나 환경파괴는 아랑곳하지 않고 상품의 대량생산만을 추구하는 기술자들은 분명 도덕적 책임이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예는 과학과 기술의 본질적 문제라기보다 사회적인 문제이니, 과학기술이 이렇게 비인간적, 반사회적으로 쓰이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시민들이 과학기술정책에 참여하는 것은 물론 환영할 일이고, 특히 공공부문의 과학기술 개발정책은 국민들의 사회적 합의에 의해 이루어져야 한다. 예를 들어 정부의 연구비가 국방기술이나 환경파괴적 상업기술보다 환경보호와 보건복지를 위한 기술개발에 더 쓰이도록 유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시민들의 사회적 참여가 과학기술의 많은 영역 중에서 중요하다고 합의된 분야를 우선적으로 발전시킬 수 있을 지는 몰라도 그 과학기술의 본질적 내용을 변화시키리라고 기대하기는 어렵다.

"암흑상자"여는 균형있는 시각

우리나라에서 과학에 대한 대중적 이해는 매우 중요하다. 과학기술이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지고적 선이며 절대적 가치라고 주장하는 것도 진실과는 거리있는 독선적 태도이지만, 지나친 상대주의에 흘러 과학기술에 대한 신뢰를 잃게 하는 것도 경계해야 할 일이다. 소위 '과학전쟁'이라고 이름 붙여진 과학지식사회학의 논쟁이 인문사회학자와 자연과학자간의 문화적 충돌로 끝날 것이 아니라, 일반인들이 '암흑상자'처럼 느껴왔던 과학지식의 본질을 균형있는 시각으로 이해할 수 있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3재반론 : 오세정 교수의 반론 "상대주의 과학관에 문제있다"를 읽고주신 98.4.6 /김환석

먼저 필자의 글 "과학기술학과 새로운 과학기술정책"에 진지한 관심을 보이고 반론을 펼쳐주신 오세정교수에게 감사를 드린다.

대개는 과학기술에 대해 비과학기술자가 시비를 걸어오면 과학기술자는 대응을 하기보다는 묵살을 함으로써 자신의 권위를 지키곤 하는데, 이는 더 이상의 생산적인 대화와 사회적 학습과정을 봉쇄하는 행위라고 평소에 필자는 안타깝게 여겨왔다. 그런데 예상치 않게 과학자로부터 진지한 반론을 받고보니, 이 논쟁을 보다 의미있게 이끌어 그동안 우리 사회와 학계에서 고착된 '두개의 문화'를 조금이라도 깨뜨리는 계기가 되었으면 하고 바라면서 이 재반론을 쓴다.

오세정교수는 "우리나라 과학기술 정책결정에 더 많은 국민들의 참여가 필요하고 이를 위해 교육제도의 개혁이 요구됨에는 전적으로 동의"한다고 글에서 밝히고 있다. 그러면서 우리나라 과학기술정책의 문제점으로 국민의 과학기술에 대한 이해의 부족, 그리고 전문가들의 고압적 태도와 권위주의를 들고 있다. 그러나 그는 과학기술정책의 민주화의 논거로서 필자가 제시한 과학기술사회학의 '사회적 구성론'에 대해서는 그것이 위험한 '상대주의'에 흐르고 있다는 점에서 비판하고 있다. 그 비판의 요점은, 첫째, 과학도 때로 사회의 영향을 받지만 근본적으로 '자연'이라는 심판자에 의해 결정되며, 둘째, 과학기술의 본질적 내용과 그것의 사회적 역기능(환경파괴 등)은 서로 엄밀히 구별되어야 하고, 셋째, 대안적 과학기술을 발전시켜야 한다는 주장은 과거 나치 우생학이나 소련의 '리셍코주의' 유전학에서 보듯 위험하기 짝이 없다는 것이다.

필자는 이 세 가지 비판점에 대해 모두 동의하지 않으며, 이들은 새로운 것이 아니라 서구 사회에서 60년대 이후 제기된 과학 비판에 대해 기존의 과학자들이 과학의 가치중립성을 주장하면서 근대과학을 옹호하기 위해 오랫동안 사용해왔던 논리임을 지적하고자 한다. 그리고 바로 '사회적 구성론'이 이러한 지배적 과학관의 맹점을 드러내는 데 가장 효과적인 시각을 제공해온 대표적 이론임을 주장하려 한다. 한마디로 사회적 구성론의 요점은, 모든 인간의 지식이 그렇듯이 근대과학도 자연의 단순한 재현이 아니라 특정한 시대와 문화에 뿌리를 둔 '국지적'(local) 지식이라는 것이다. 이는 인식론적인 측면과 문화사적인 측면에서 공히 살펴볼 수 있다.

사회적 구성론의 인식론적 근거는 '증거에 의한 과학이론의 과소결정' 명제와 '관찰의 이론의존성' 명제의 두 가지로 압축된다. 전자는 관찰의 결과가 어떻게 나타나든 이론은 그 하위의 보조가설들을 조정함으로써 원칙적으로 항상 유지가능하다는 것이고, 후자는 어떤 것이 적절한 증거와 관찰방법으로 간주되느냐 자체가 이미 이론에 부분적으로 배태되어 있어 관찰이 이론 선택의 독립적 중재자의 역할을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 두 가지 명제는 오늘날 과학철학자들에게 폭넓게 인정되고 있을 뿐 아니라 사실상 아인슈타인 등 현대 물리학자의 생각에서도 크게 영향받은 것이다. 따라서 자연이 과학의 심판자 역할을 한다는 것은 소박한 생각이며, 자연에 대한 인간의 인식은 불확실성과 비결정성이 불가피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과학은 따라서 자연뿐 아니라 사회관계(과학자사회 및 이를 둘러싼 거시적 사회)와의 이중적 상호작용에서 결과하는 협상적 지식의 성격을 띠게 된다고 사회적 구성론에서는 보는 것이다.

문화사적으로 볼 때 근대과학은 16세기 이후 서구 사회에서 부상하던 신흥중산층의 세계관으로서, 초기에는 신이 창조한 자연의 질서를 탐구하여 신의 영광을 찬양한다는 기독교적 가치에서 배태된 것이었다. 또한 이는 비서구와 자연·여성 등에 대한 군사적, 정치경제적 정복과 깊게 연관이 된 것이기도 하였다. 18세기의 계몽주의에 이르러 신흥중산층이 기독교와 귀족 세력으로부터 독립을 추구하게 되자 근대과학은 자신의 탯줄인 기독교와 단절을 선언하면서 중립성·합리성 등 스스로 인식론적인 권위를 주장하게 되었던 것이다. 오늘날 중립성을 주장하는 거대과학 역시 2차대전과 냉전하에서 과학이 군사화·산업화의 길을 걸은 것과 깊게 연관되어 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근대과학의 문화적 뿌리를 살펴보면 자연/문화, 야만/문명, 여성/남성간의 뿌리깊은 이분법에 기초해 있으며, 여기서 과학의 본질적 내용과 그 사회적 역기능을 분리해내는 건 애초부터 불가능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사회적 구성론이 '상대주의'여서 위험하다는 주장도 역시 별 근거가 없다. 사회적 구성론이 따르는 상대주의는 어떤 과학지식의 진위 판단과 관계없이 그것의 사회적 구성과정을 분석해야 한다는 방법론적 상대주의일 뿐이지, 모든 지식은 다 상대적으로 참이라는 인식론적 상대주의나 관찰 데이터 외의 자연 실재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반실재론은 아니다. 더 나아가서 진정 위험한 것은 상대주의가 아니라 비성찰성일 것이다. 나치 우생학이나 리셍코 유전학은 기존 과학이 '사이비' 과학이고 자기네 과학만이 '참된' 과학이라고 주장한다는 점에서 오히려 기존의 절대주의적 과학관과 닮아 있다. 근대과학 역시 자신의 국지성을 인정하지 않고 보편합리성을 주장함으로써 '위험사회'로 치닫는 길을 달려 왔다. 사회적 구성론의 기여가 있다면 그것은 이런 근대과학에 성찰성을 촉구함으로써 도구적·계산적 이성의 획일적 지배를 막고, 더 나아가서 과학기술의 생산을 보다 민주화하려는 노력을 자극할 것이라는 사실이다.

4균형있는 시각의 과학관을 재반론: 김환석교수의 반론 '절대주의 과학관을 넘어'를 읽고 98.5.4 /오세정

본인의 졸고 '상대주의 과학관에 문제있다'에 대해 김환석 교수는 '절대주의 과학관을 넘어'(132호 6면)라는 재반론을 쓰면서, “그동안 우리 사회와 학계에서 고착된 '두 개의 문화'를 조금이라도 깨뜨리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고 했다. 본인도 같은 희망을 가지고 이러한 인문사회학자와 자연과학자 간의 토론이 문화적 장벽을 넘어 과학지식의 본질을 균형있는 시각으로 이해하는 계기가 되기를 바라면서, 김 교수가 제기한 논점에 대해 일반 과학기술자들이 느끼는 점을 좀더 자세히 기술해 상호간의 이해를 넓히고자 한다.

김 교수는 과학기술사회학의 '사회적 구성론'에 대한 본인의 비판을 세 가지 핵심점으로 요약하면서, “이들은 새로운 것이 아니라 서구 사회에서 60년대 이후 제기된 과학비판에 대해 과학자들이 근대과학을 옹호하기 위해 오랫동안 사용해 왔던 논리”임을 지적했다.

사실 본인은 과학기술사회학을 깊이 연구한 사람이 아니라 단지 평소 외국에서 벌어지는 논쟁을 관심있게 지켜보다가 교수신문의 원고청탁을 받고 좀더 체계적으로 들여다 본 바에 불과하며, 따라서 과학지식사회학에 대한 새로운 비판이론을 제기하고자 한 것은 아니다. 다만 실제 과학연구에 종사하는 사람으로서 이 이론에 대해 느끼는 점을 밝히고자 했을 뿐이다. 하지만 30여년 전에 제기된 반박이론에 대해 아직도 과학기술사회학이 대부분의 자연과학자들을 납득시킬 만한 해답을 제시하지 못했다는 사실은, 이 학문의 한계를 보여주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가지게 하기에 충분하다.

김 교수는 '사회적 구성론'의 근거로서 인식론적인 측면과 문화사적인 측면을 지적했다. 인식론적인 근거로는 실험의 결과에 관계없이 이론은 그 하위의 보조가설을 조정함으로써 항상 유지 가능하다는 '증거에 의한 과학이론의 과소결정' 명제와, 관찰의 해석 방법 자체가 이미 이론에 배태돼 있다는 '관찰의 이론의존성' 두 명제를 들고 있다. 필자도 이 두 명제가 형식논리적으로는 틀렸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 명제가 실제 과학현장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제대로 나타내고 있느냐에 대하여는 부정적이다. 사실 공리(axiom)에서 출발해 그 논리적 결과를 추론하는 수학과는 달리 자연현상을 설명하려는 자연과학에서 어느 이론이 확실히 맞다고 증명하는 것은 원칙적으로 불가능하다. 대부분의 과학자들도 소위 과학적 법칙이라는 것은 단지 현재까지의 관측결과를 일관성있게 설명하는 '경험적 법칙'일 뿐이며, 이 '법칙'으로 설명할 수 없는 실험적 사실이 관측될 때까지만`-`물론 이 때가 영원히 오지 않을 지도 모르지만`-`진실로 인정된다는 인식을 가지고 있다. 또한 실험사실만으로 이론의 진위를 결정하는 것이 극히 어렵다는 것도 알고 있다. 끊이지않는 생물학에서의 진화론 논쟁은 이 사실을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으며, 심지어 미국에는 외계에서 찍은 지구의 사진이 발표된 지금도 지구가 평평하다고 믿는 사람들의 단체가 있어 정기적인 학술대회를 개최하고 있다.

하지만 경험과학의 이러한 논리적 한계를 확대 해석하여 과학이론이 과학자 사회 및 거시적 사회와의 협상적 지식의 성격을 띤다고 주장하는 것은, 실제 과학현장에서 일어나는 일을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한 채 형식논리에 지나치게 집착하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된다.

물론 소위 '제도권' 과학자들은 이해하기 어려운 새로운 실험사실이 나오면 가능한 한 과거의 이론으로 설명하려고 그 하위가설을 조정하는 등 여러 가지 시도를 한다. 예를 들어 19세기말 빛의 속도가 일정하다는 실험 사실을 종래의 고전물리학 이론 내에서 설명하려고 로렌츠를 비롯한 당시의 유명한 물리학자들은 여러 가지 시도를 했었다. 그러나 여러 실험사실들을 설명하려는 그 시도들이 점점 부자연스러워지면서 권위있던 고전물리학 이론의 신빙도가 떨어지게 되었고, 대신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과 같이 간단명료한 대치이론이 인정받게 된 것이다.

과정에서 고전물리학의 설명방식이 얼마나 부자연스러운 지는 과학자들이 아니면 이해하기 어렵기 때문에 국외자들은 과학자들 간의 사회적 관계 등에서 그 원인을 찾을 지 모르지만, 이것은 마치 오래된 문화전통을 가진 다른 문명사회를 제대로 이해 못하는 외부의 인류학자가 그 생활행태를 자신의 잣대로 잘못 해석하는 것과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

또한 문화사적인 근거로 제시한 근대과학의 태생에 관한 주장은, 마치 철학자의 사상을 내용 그대로 보지 않고 그의 출신성분과 성장과정에 의해 미리 판단하려는 일과 같아 보인다.

근대의 과학과 기술이 역사적으로 군사화·산업화와 깊이 연관돼 있었다는 것은 사실이고, 그 때문에 예를 들어 환경보전 기술보다 소비를 조장하는 생산기술이 더욱 발전된 것은 애석한 일이다. 하지만 원래 군사적인 목적으로 개발된 미세전자공학기술이 지금은 의학에도 응용되어 많은 사람들에게 의료혜택을 주듯이, 과학기술이 발전하게 된 사회적 여건이 그 본질적 내용과 기능을 결정한다고 보는 것은 단순한 생각이다. 김 교수의 주장대로 과학기술과 그 사회적 역기능을 분리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면, 그 순기능 또한 분리하는 것이 불가능할 것이다. 과학기술의 본질은 아마도 역기능과 순기능을 종합한, 그 자체만으로는 선악을 판단하기 어려운 가치중립적인 것이 아닌가 한다.

모든 과학기술의 발달이 지고의 선이며 절대적 가치라고 주장하는 독선적 태도에는 물론 위험한 면이 있고, 과학기술자들도 환경파괴와 대량살상무기의 출현 등 근대과학기술의 부정적 결과에 대해 비판적인 자기성찰을 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현재까지 발전한 과학기술이 그 태생적 원인 때문에 본질적으로 위험사회를 초래하는 부정적 역할이 클 수 밖에 없다는 예단 또한 독선적이며 균형을 잃은 시각이라고 생각한다.

좀더 균형적인 시각에서 종합적으로 과학기술의 본질을 이해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보며, 인문사회학자와 자연과학자 간의 격의없는 토론이 이를 위해 도움이 되기를 기대한다.

5논쟁을 보고: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과학기술학의 존재이유는 과학의 '본질을 파헤치는 일 98.5.11 /송상용

두달 동안 네차례나 '교수신문'에 실린 김환석, 오세정 두 교수의 '과학관 논쟁'을 비상한 관심을 가지고 지켜 보았다. 한마디 해달라는 부탁을 받고 주저했다. 문제가 너무 거창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젊은 학자들이 안 쓴다면 그냥 지나갈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어 끼여들기로 했다. 이 논쟁은 미국에서 여러 해째 계속되고 있는 '과학전쟁'을 연상하게 한다.

'과학전쟁'은 2년 전 물리학자 소칼이 과학문화학 쪽 잡지에 가짜 논문을 실음으로써 치사한 싸움으로 확대됐는데('교수신문' 96호(1996년 9월 9일자)참조) 한국판 과학전쟁은 아주 신사적으로 예의바르게 진행돼 다행이다. 김교수의 글은 사회구성주의가 새로운 과학기술정책에 도움이 된다는 요지였다. 오교수는 사회구성주의를 물고 늘어졌고 마침내 상대주의 논쟁으로 번졌다. 이 논쟁을 본 모든 과학자들은 오교수를 지지할 것 같다. 과학에 관심을 갖는 젊은 사회학자들은 대부분 김교수 편을 들 것이다. 이 두 부류에 속하지 않는 나는 어떤가. 과학기술학을 공부하는 나는 일단 김교수의 주장에 호감이 간다. 반면 다른 점은 내가 사회구성주의의 기여를 인정하면서도 그것을 선뜻 받아들이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오교수의 입장도 충분히 이해한다. 그것은 내가 과학 배경을 갖고 있는 까닭이다. 나는 과학을 떠난 한참 뒤까지도 순진한 과학주의자였다. 쿤에게서 비롯된 새 과학관이 모든 문제의 발단이 쿤의 '과학혁명들의 구조'(1962)임은 부인하기 어렵다. 쿤은 상대주의, 주관주의, 비합리주의의 바람을 일으켰고 정통 과학철학자들의 집중공격을 받게 됐다. 포퍼-쿤 논쟁에서 포퍼의 명쾌한 논리보다 허점투성이의 쿤의 주장이 설득력이 있었던 것은 그의 현장경험과 해박한 역사지식 때문이다. 쿤의 혁명적 과학사서술은 역사학자들에게는 환영을 받았다. 쿤이 자신을 상대주의자, 주관주의자, 비합리주의자가 아니라고 구차한 변명을 늘어 놓은 것은 흥미있다. 그는 계속된 비판 앞에서 무디어졌고 후퇴를 거듭한 끝에 죽을 무렵에는 '공약불가능성'(같은 잣대로 비교할 수 없음)만은 양보할 수 없다고 했다고 한다. 쿤의 새 과학관은 철학자들에게 잘 받아들여지지 않았으나 과학철학 전반에 그의 영향은 지울 수 없게 됐다. 머튼이 시작한 과학사회학은 1970년대에 '강한 프로그램'이라는 과학지식사회학으로 발전했는데 여기서도 쿤의 '과학자사회' 개념이 중요한 촉매가 됐다고 한다. 과학의 내용은 사회적 요소에 의해 구성된다는 사회구성주의는 과학사학자 셰이핀과 섀퍼가 쓴 '리바이어선과 진공펌프'(1985)가 나오면서 큰 힘을 얻었다. 한편 라투르와 울가의 '실험실생활'(1979)은 소크연구소의 연구원들의 TRF호르몬 발견이 두 연구팀 사이의 협상과 합의에 의해 구성된 것을 밝혀냈고 피커링의 '콰크의 구성'(1984)은 콰크가 발견된 것이 아니라 구성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런 매력있는 구체적 사례연구는 사회학자 벤 - 다비드, 철학자 라우든 등의 강한 비판을 받았지만 사회구성주의는 오늘날 과학사회학의 주류를 이루고 있다. 많은 철학자들은 사회구성주의를 받아들이지 않으면서도 그 영향을 받아 실재론, 합리성의 입장이 흔들리게 됐다. 이와 같은 일련의 발전은 와인버그 같은 사람의 과민한 반응에서 보듯이 과학자들의 우려를 일으키기에 충분하다. '과학철학의 4인방' 가운데 극단으로 간 파이어아벤트는 갈릴레오와 가톨릭교회가 피장파장이라고 하며 인식론적 무정부주의로 치달았다. 처음에 기대를 모았던 '신과학'(일본과 한국에서만 쓰는 말)은 묘한 신비주의로 빠져 들어갔다. 한국에서는 '창조과학'이라는 사이비과학이 과학자들에게 먹혀들어가고 있다. 무참히 짓밟혀버린 합리성이 재건돼야 한다는 것은 과학자들만의 바람은 아닐 것이다. 이런 난맥상에도 불구하고 과학의 본질은 파헤쳐져야 한다. 그런데 과학자가 자기가 하는 과학의 참 모습을 보는 데는 한계가 있다. 여기에 과학에 대해 역사적철학?사회적으로 종합적인 접근을 하는 과학기술학의 존재이유가 있는 것이다. 물론 당사자인 과학자들의 의견도 무시돼서는 안된다. 작년에 '과학기술 민주화를 위한 모임'이 출범할 때 들은 얘기가 생각난다.

물리학과 출신으로 토론토대에서 과학사회학을 가르치는 홍성욱 교수는 '과학전쟁'을 소개하면서 과학자들과 대화가 중요함을 강조했다. 그가 그 논문을 다른 사람들이 보기 어려운 '한국과학사학회지'에 기고한 것은 아마 과학자들을 자극하지 않으려는 노파심에서였는지도 모르겠다. 과학자들도 과학기술학을 위험시할 것이 아니라 그 연구성과를 진지하게 이해하려는 자세를 갖추어야 할 것이다. 내가 이공계 학생들에게 강의할 때 하는 말이 있다. 과학기술학은 단순한 머리를 복잡하게 해 전공 공부에 큰 방해가 되겠지만 책임있는 과학기술자가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알아야 한다고. 과학기술학에 무관심한 과학자는 행복할지 모르나 위험한 존재가 될 수 있다. 과학과 가치는 분리될 수 없어 과학을 악용하는 세력이 나쁘지 과학 자체는 중립이니까 과학자에게는 책임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아직도 많다. 라비츠는 순수과학이 원자폭탄과 더불어 끝났다고 했거니와 과학이 중립이라는 신화는 깨져야 한다. 과학과 가치는 분리될 수 없고 분리돼서도 안된다. 과학에 가치가 개입되는 것이 불가피하다면 과학자들은 과학기술학에 눈을 돌리지 않을 수 없다. 나는 평소에 과학과 사회에 관한 오교수의 훌륭한 글을 즐겨 읽고 감탄하곤 한다. 오교수와 같은 사려깊은 과학자들이 곧 발족하게 될 과학기술학회에 참여해 인문사회과학자들과 대화하고 신선한 바람을 불어넣기를 기대한다.

6재반론:오세정 교수의 반론 "상대주의 과학관에 문제있다"를 읽고, 사회적 구성론에 대한 오해들 98.5.18 /김환석

이 글은 오세정교수의 재반론에 대한 응답인 동시에 '사회적 구성론'에 대한 몇가지 흔한 오해에 대하여 해명하고자 하는 목적으로 쓴다.

먼저 오교수는 사회적 구성론의 인식론적 근거인 '증거에 의한 과학이론의 과소결정'과 '관찰의 이론의존성' 두 명제에 대하여 적어도 형식논리적인 타당성을 인정하는 유연한 자세를 보여주었다. 그러나 이들 명제는 과학현장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정확하게(실질논리적으로?) 나타내고 있지 못하다고 비판하면서, 빛의 속도가 일정하다는 실험사실을 둘러싸고 고전물리학 이론이 상대성이론으로 대체되는 경우를 사례로 들었다. 하지만 이는 사회적 구성론을 반박하는 증거가 되지 못한다. 왜냐하면 사회적 구성론에서도 실험결과가 이론의 선택과 무관하다고 주장하는 것이 결코 아니기 때문이다. 단지 그러한 실험결과가 자연의 유일하고 순수한 반영이며 따라서 이론에서 독립된 심판관 역할을 한다는 점을 부정할 뿐이다. '관찰의 이론의존성'은 실험에 의한 과학적 '사실'이 이론에 의지하여 성립됨을 주장하는 것이며, 따라서 관찰이 이론 선택의 완전한 결정자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산소의 발견을 쉬운 예로 들 수 있다. 산소는 18세기 후반에 라브와지에가 발견하고 '산소'(oxygen)라고 명명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산소 기체로 인한 물 속의 거품 현상은 18세기에 나타난 것이 아니라, 고대와 중세에도 그리고 유럽뿐만 아니라 아시아에서도 일어났을 것이며 그걸 목격한 사람도 많을 것이다. 따라서 산소의 발견이란 '사실'은 단순히 눈으로 그것을 목격한 행위와는 다른 어떤 것이며, 그것은 산화와 환원에 관한 통일적인 이론이 세워졌을 때 이에 의해 비로소 '사실'로서의 자격을 얻게 됨을 알 수 있다. 마찬가지로 X선 사진에서 일반인은 희미한 그림자만 보지만 의사는 암을 발견할 수 있는 것도, 사진(특히 X선)에 관한 지식에서부터 호흡기 생리학이론, 암에 관한 해부학 및 병리이론 등을 의사가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이다.

과학지식이 '사회적으로 구성된다'는 주장을 어떤 과학자들은 과학의 가치를 부정하는 반과학주의로, 또 어떤 과학자들은 객관적 진리를 부정하는 비합리적 주관주의로 매도한다. 지식의 타당성을 재는 척도는 그 지식을 주장하는 개인 혹은 집단의 자의적이고 주관적인 기준에 따라 달라진다는 주장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사회적 구성론은 모든 지식이 다 동등한 신뢰성을 지닌다는 극단적 상대주의이며, 결국 이성을 부정하고 반문명적 시도를 부추기는 위험한 사상이라고 비판된다. 그러나 이는 오해에서 비롯된 잘못된 비판이라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사회적 구성'이란 과학적 지식이 과학자사회의 상호작용의 산물인 사회적 규약(과학적 개념, 이론, 방법, 실험기법, 관찰결과의 평가 등에 관한)을 통해 만들어지며, 따라서 이 규약은 과학자들이 자연을 관찰하고 해석하는 창이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 규약은 해당 과학자사회가 속한 시대와 문화에서 독립적인 것이 아니라 그 영향하에 있는, 본질적으로 협상적이고 문화적인 성격을 지닌다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사회적 구성론은 근대과학이 시대와 문화를 초월한 보편합리적 지식임을 부정하고 국지적(local) 지식임을 지적하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개인과 집단의 자의적 판단에 따라 구성되거나 객관적 타당성이 없다고 부인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사회적 규약과 문화란 자의적으로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 단기간에 쉽게 변할 수 없는 견고한 사회제도이며, 그러한 사회제도가 유지되는 한 특정 과학지식의 타당성은 그에 속한 객관적 기준에 따라 판단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 문화 일반이 그렇듯이 과학자사회의 사회적 규약도 변화하게 마련이며, 따라서 과학적 지식은 진리이되 항상 불확실하고 부분적이고 잠정적인 성격의 진리라고 볼 수 있다. 과학자사회의 규약을 바꾸어 관찰결과를 다르게 해석할 수 있는 가능성이 원칙적으로 항상 열려 있기 때문이다. 오랫동안 확고한 진리로 여겨져 왔던 프톨레미의 천동설을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이, 뉴턴의 역학을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이 대체한 과학의 역사 자체가 이러한 가능성을 웅변해주고 있다.

또한 사회적 구성론을 과학지식이 '자연'과는 무관하게 좁은 의미의 '사회적' 요인들(계급, 성, 정치권력, 이데올로기 등)에 의해서만 결정된다고 주장하는 것으로 보는 오해가 있다. 마치 명성이나 돈과 같은 사회적 이해관계만이 과학이론의 선택을 좌우하는 요인이라 구성론에서는 보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특정 과학자의 가치와 이해관계가 때때로 과학지식에 영향을 주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는 '외부적 오염'일 뿐 과학의 본질적 성격과는 무관하다고 반박된다. 그렇기 때문에 설사 과학의 발전에서 군사화·산업화가 깊이 연관되어 왔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과학의 내용이나 기능을 결정하는 것은 아니며 과학은 순기능/역기능을 다 할 수 있는 가치중립적인 것이라 주장되곤 한다. 그러나 사회적 구성론에서도 자연이 과학지식의 구성에 중요하다고 인정한다. 다만 자연은 여과과정 없이 과학지식에 반영되지는 않으며 항상 사회(과학자사회의 규약 및 이와 연관된 거시적 사회문화)라는 프리즘을 통과해서 선택적으로 지식화된다는 것뿐이다. 따라서 사회적 요인의 영향은 예외적 사건이거나 외부적 오염이 아니라, 자연과 더불어 항상 과학지식을 구성하는 본질적 구성요소라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좋은 과학'은 자연의 정확한 반영이고 '나쁜 과학'은 사회적 요인에 의한 왜곡에 원인을 돌리는 것은 옳지 못하다. 과학의 순기능과 역기능 역시 각기 다른 사회적 협상의 결과로서, 과학의 불확실성을 나타내는 것일 수는 있어도 과학의 가치중립성을 나타내는 것은 아니다.

과학을 민주적으로 통제하자 혹은 대안과학으로 재구성하자는 주장 역시 자율적인 과학에 부당한 통제를 가하자거나 자의적으로 과학을 재구성할 수 있다는 주장처럼 오해받고 있다. 사회적 구성론에 따른다면 과학은 항상 사회적으로 통제(과학자사회 및 국가에 의해)되어 왔고 과학의 재구성(즉 대안적 자연해석) 가능성은 항상 열려져 왔던 것이었다. 그러나 과거에 그것은 주로 엘리트들에 의해서만 조정되어 왔고, 탈냉전후 이른바 '지구화'에 따라 과학은 점점 이윤동기에 의해 추동되면서 냉전과는 또다른 위험사회를 촉진하는 쪽으로 구성되고 있다. 따라서 이제는 과학의 사회적 지반을 넓혀 그동안 소외되어 왔던 시민을 의식적으로 참여시킴으로써 그리고 이를 통해 과학자집단의 성찰을 자극하고 과학자사회 내·외부의 관행을 변화시킴으로써 보다 민주적이고 다원적인 과학과 사회질서를 촉진하자는 것이다. 과학이 사회에서 독립된 진리의 요새라는 권위적 자세는 과학을 중세의 종교로, 과학자를 그 성직자와 마찬가지로 보는 위계적 사회질서를 그 안에 내포하고 있다. 과학의 불확실성과 국지성을 인정하는 것은 과학을 약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적 활동으로서의 과학의 진정한 가치와 한계를 이해하게 만드는 것이다. 이는 과학과 비과학간의 평등하고 바람직한 의사소통을 촉진할 것이며 그럴 때에야 비로소 과학/비과학, 전문가/시민간의 '두개의 문화'를 극복하는 일이 실제로 가능해질 것이다.

7진실 왜곡 우려되는 상대주의적 과학관, 위험한 사회적 구성론 98.5.18 /오세정

김환석교수의 '사회적 구성론에 대한 오해들'이라는 글은 과학지식의 사회적 구성론에 대해 자연과학자들이 가졌던 많은 의구심을 해소시켜 주었다고 생각한다. 특히, 김교수가 '모든 지식이 다 동등한 신뢰성을 지닌다'고 주장하는 일부 과학지식 사회학자들의 극단적 상대주의나, 자연실체의 존재를 부정하는 반실재론을 배격하고 있는 것은 다행한 일이다. 김교수는 그동안 일관성있게 우리사회와 학계에서 고착된 인문사회학자와 자연과학자간의 '두 개의 문화' 장벽을 깨뜨리는 일이 시급하다고 주장했는데, 이러한 최소한의 공통기반 위에서 출발한 토론은 그 장벽을 깨뜨리는데에 크게 기여할 것이라고 기대된다. 사실 김교수의 이번 글에는 필자가 공감하는 부분도 많다. 그러나 본 논쟁의 도화선이 됐던 김교수의 상대주의에 입각한 과학기술정책, 즉 “과학적 지식이 과학자들간의 사회적 협상과 합의에 의해 구성된 것이므로 선량한 의식을 가진 일반시민들이 참여해 현대 과학의 본질적 내용을 바꿈으로써 그 폐해를 제거한 인간적이고 환경친화적인 대안적 과학기술을 발전시켜야 한다”는 주장의 논리적 근거는 되지 못한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며, 이러한 상대주의 관점의 과학기술정책은 오히려 위험할 수 있다는 견해에는 변함이 없다.'해석'은 바뀌어도 '결과'는 변치 않아우선 근대과학이 보편합리적인 지식이 아니라 국지적 지식이라는 주장을 살펴보자. 김교수가 지적한대로 과학자들이 자연을 관찰하고 해석하는 틀이 되는 과학적 개념이나 이론, 평가 방법 등은 시대와 문화의 영향을 받을 것이다. 또한 필자는 현재의 과학기술체계가 절대적이고 유일한 것이라고 믿는 일부 과학자의 주장보다는 오히려 “과학적 지식은 진리이되 항상 불확실하고 부분적이고 잠정적인 성격의 진리”라는 김교수의 견해에 동의하는 편이다. 마치 한의학과 양의학이 서로 다른 논리체계를 가지고 모두 사람의 병을 고칠 수 있는 것과 같이 현재의 과학이론 이외에도 자연현상을 합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다른 논리체계가 있을 지 모르며, 같은 관찰결과라도 다르게 해석할 수 있는 가능성은 원칙적으로 항상 열려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자연과학자들이 받아들이는 자연과학에서의 보편성은 어떤 이론이나 해석이 시대와 장소에 따라 절대 불변이라는 것이 아니라, 정해진 조건에서 사물을 '측정'했을 때 그 결과가 시대와 장소에 따라 변치 않는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잘 익은 사과는 중세때나 지금이나 땅으로 떨어지며, 그 현상은 한국이나 영국에서나 모두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또한 과학에서 다루는 문제는 이와같은 '실험적으로 측정가능한 현상'이어야 한다는 인식이 양자역학이 발전된 후로 보편화돼 있다. 예를 들어 “저기 고양이가 있느냐” 라는 질문은 과학적 질문이 아니며, 대신 “빛을 쪼여주었을 때 고양이에서 반사된 빛이 시신경에 감지되느냐” 라는 질문만이 과학적 해답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이렇게 관측된 현상에 대한 해석과 이론은 시대와 장소에 따라 바뀔 수 있고 실제로 계속 바뀌어왔다. 그러나 이것이 과학자들간의 사회적 규약이나 협상의 결과라고 보는 것은 무리가 있다. 어떤 과학이론이건 '실험적 예측'을 하고 이에 대한 측정결과에 따라 眞僞를 판정하는 것이 원칙이기 때문에, 자연이 매우 까다로운 심판자의 역할을 하는 까닭이다.

시대에 따라 과학적 해석이 바뀌는 것은 사회적 규약이나 문화가 달라지기 때문이 아니라, 새로운 환경에서 측정한 실험 중에서 과거의 이론으로 설명할 수 없는 사실들이 많이 나오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19세기말 미세한 원자세계의 특성을 측정하기 시작하면서 일상생활에서 다루는 물체의 성질을 잘 기술하던 고전물리학의 한계가 드러나 양자역학이 나오게 됐던 것이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양자물리학은 고전물리학을 일상적인 조건에서는 잘 맞는 근사적인 법칙으로 포용하게 된다. 즉, 새로운 이론은 과거의 이론보다 더욱 넓은 범위의 실험사실들을 일관성있게 설명할 수 있기 때문에 받아들여지는 것이지, 사회적 규약이 바뀜에 따라 과거의 경험적 법칙들을 완전히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좋은'과학은 어떻게 가능한가 따라서 과학기술에 참여하는 사회적 구성을 바꾸면 현재의 과학과 본질적 내용이 다른 대안적 과학기술이 발전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현실성이 없다. 게다가 인간의 창의적인 지적활동인 과학에 인위적인 목적을 부과하는 것은 위험하기조차 하다. 인류역사를 통해 善하던 惡하던 간에 특정한 목적을 위한 문화활동은 利보다는 害를 더 많이 끼쳐왔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기 때문이다. '좋은 과학'은 아무런 편견없이 관측사실들을 객관적으로 평가하고 설명하는 데에 있다. 나찌의 우생학이 '나쁜 과학'인 이유는 이러한 과학의 正道를 무시하고 특정한 목적을 가지고 편향된 실험사실만 수집해 왜곡된 해석을 내렸기 때문이다. 아무리 '인간적이고 환경친화적'인 사회를 만든다는 목적이 바람직하더라도 특정한 시각에서 관측사실을 바라보면 진실과 동떨어진 해석이 나오기 쉽기 때문에 오히려 올바른 과학기술의 발전을 저해할 수도 있다. 물론 과학적 지식을 인류의 목적에 맞게 이용하는 것이 목표인 기술의 경우는, '좋은 기술'과 '나쁜 기술'을 판단함에 있어 공학적 효율성 이외에 그 사용 목적의 선·악 또한 고려하는 것이 당연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현대산업사회를 이끌어 온 기술이 환경보전적이기보다는 환경파괴적이며, 지금까지 인류의 삶의 질을 향상시키는 기술보다 무기제조기술이 더욱 발달했다는 사실은 큰 문제이고, 이에 대한 과학기술자들의 비판적 성찰이 필요하다 하겠다. 이러한 점을 개선하기 위해 국가의 과학기술정책 결정과정에 일반 국민들의 참여를 확대하고, 전문가 위주의 폐쇄적 정책결정과정을 좀더 투명하게 공개하는 것은 환영할 일이다. 이 과정을 통해 좀더 환경친화적이고 삶의 질 향상에 도움이 되는 분야를 중점 육성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렇게 함으로써 인간적이고 환경친화적인 대안적 과학기술이 나올 것이라는 기대는 비현실적이며, 근본적으로 인간의 윤리와 도덕에 관련된 문제를 과학기술 본질에 관한 문제로 억지로 전가하는 일이 아닌가 한다.